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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와 군화

writing_cyn 2022. 5. 16. 00:06

“진짜로 이번 시험 평균 80점 넘으면 mp3 사주는 거다!”

b는 나름대로 자신감 있게 엄마에게 외친 후 그 해 여름 내내 해본 적도 없는 예습이라는 것을 시작했고, 그 결과 당당하게 손에 최신형 mp3를 가질 수 있었다. b의 반에서 mp3가 있는 사람은 고작 b와 다른 남자 애 한 명뿐이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의 mp3 기종이 같았던 건 1초 정도의 눈 맞춤과 민망함으로 끝난 가벼운 해프닝이었지만, 그 어색한 순간은 왜 그런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b는 원하던 mp3도 손에 넣었고 덕분에 오른 성적과 공부에 대한 동기까지 한 번에 세 마리 토끼를 잡은 격이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다른 친구들이 울상으로 학원으로 갈 때, b는 자신의 친구들과 즐겁게 떠들며 학교 근처 무료 독서실로 향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었다. 그렇다 보니 실상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이 반이었지만, 그중에서도 b는 나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독서실이라고 해도 부스럭거리는 소리,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소리, 조용히 얘기한다고 하는 아이들의 속닥거림이 때로 b를  방해하곤 했지만, 이제 그 얘기는 b와는 다른 세상 얘기다. 왜냐하면 b에게는 그런 소음들을 막아줄 mp3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방에서 가장 인기가 좋고 조용한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b는 칸막이가 있어서 누구에도 보이지 않지만 누가 보고 있는 것처럼 양쪽 이어폰을 귀에 꽂곤 했다. mp3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는 내 모습, b는 자신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맘껏 그리며 이번에는 엄마에게 뭘 사달라고 거래를 할지 즐거운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b가 다니는 중학교의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다. 그중에는 b가 초등학생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중학생이 되니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j는 초등학교 때부터 꽤 있기가 많았다. 하얀 얼굴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이 남자아이는 꽤 장난꾸러기라서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넘쳤다. 물론 남자 친구뿐 아니라 여자 친구들도. 초등학생 때는 키가 비슷해서 같은 반을 하면 줄곧 짝꿍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b가 티는 안 내고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j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어쩐지 남자아이들이 키도 금방금방 크고 힘도 세지니 어쩐지 하얀 그 아이가 멋있어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때의 두근거림은 사라지고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편한 친구사이가 된 건 이때부터 였을 것이다.  

 

J 또한 b와 같은 무료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렇지만 둘이 만나서 함께 얘기를 나누거나 무언가를 같이 먹는 사이는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너는 어디까지 공부했냐, 이거 진짜 재미없지 않냐’ 등 혹은 인기 있는 만화책 이야기를 간혹 하기는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b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독서실에 도착했고, j는 이미 도착해서 구석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j가 앉은 쪽 자리들은 꽤 인기가 있는 자리였는데, 웬일인지 비어있어 자리를 맡아준 건지 몰라도 b는 속으로 ‘아싸’라고 외치며 j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한 때는 짝사랑했던 아이의 옆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자니 조금 의식되기도 했지만 아마도 b에게는 그다음 시험의 보상이 조금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날의 독서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살짝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은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계속 문을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서로의 자리로 가서 키득키득 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렇지만 이제 알다시피 b는 가방에서 빨간색 자동차 모양의 mp3를 천천히 꺼냈다. mp3는 줄에 칭칭 감겨있었다.  이어폰 줄을 풀고 있는 데 갑작스럽게 j가 말했다. ‘나도 같이 들으면 안 돼?’ 응? 이게 무슨 상황일까?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하는 j의 얼굴을 보며, b는  찰나의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 ‘mp3는 양쪽을 다 들어야 되는 건데 같이 듣자니?, 아무리 옆자리라고 해도 한쪽씩 들으면 줄이 짧을 텐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지? 오늘 너무 시끄럽나? 한쪽씩 들으면 그게 그거일 텐데..’ 만약 평소에 j가 b에게 그런 언질이라도 했더라면 (mp3 듣고 싶다는, 간혹 그런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하는 j의 동그랗고 밝은 갈색 눈을 본다면, b가 그런 것처럼 선뜻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근데 별로 좋은 노래 없어’라고 말한 건 그다음 말을 위한 초석이었다. ‘만화 노래밖에 없는데..’ 같이 듣는 건 솔직히 b에게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일은 바로 최근에 b가 mp3에 넣어 놓은 대부분의 음악이 만화 오프닝이나 엔딩 노래였던 것이다. 아,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나는 만화 노래를 듣는 중학생인 걸까 라는 생각이 든 건, 그냥 만화 노래를 듣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j와 함께 듣는 노래가 고작 만화 노래라서 싫은 건지는 모른다. 차라리 j가 그럼 안 듣는다고 하는 게 b에게는 더 좋을 것 같았지만,  j는 ’ 상관없어’라고 말하곤  b를 향해 이어폰 한쪽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어차피 j는 b가 만화를 좋아하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무슨 상관있겠는가. b는 j의 손에 왼쪽 이어폰을 건네주고 자신의 오른쪽 귀에 나머지 이어폰을 꽂았다. 각자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알 수 없는 일본 노래가 흘러나왔다. j가 어떤 생각으로 그 노래들을 들으며 그날 저녁까지 공부했는지 b는 모른다. 다만 알게 된 것은 한쪽 이어폰을 나눠 듣는다는 건 꽤 가까운 거리에 서로가 있어야 하는 것,  혹시라도 내가 몸을 기울이다가 이어폰이 당겨져서 j의 이어폰이 빠질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 그리고 고작 이어폰을 나눠서 같은 음악을 듣는다는 게 굉장히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b는 그날 저녁 내내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b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 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다시 j를 보면 설레기 시작했으니까. 그날의 분위기, 공기, 책을 넘기던 소리, 서로 이어폰이 빠지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해서 공부를 하던 순간과 자신의 mp3를 함께 듣고 있는 j의 공부하는 옆모습까지도 b는 생생히 기억한다. 아, b는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마음은 그냥 금방 생기고 금방 없어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울분도 났다. ‘그럼 난 쟤를 도대체 얼마나 좋아한 거야?! 어차피 모를 텐데’ 왜인지 억울한 b의 마음은 얼마 안 가 한 줌의 재처럼 사라졌다. j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다른 여자 s와 사귀게 된 것이다. 순간에는 화도 났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그 설레던 마음도 금방 사라졌다. 둘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b의 마음을 알았다면 지금껏 친구로 지낼 수 도 없었을 것임을 b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사귀게 된 s는 전학 온 지 얼마 안 돼 그렇게 좋은 아이는 아니라는 품평을 받게 되었고 둘은 곧 헤어지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조금은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b였다. 시간은 금세 흘러 b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친구들이 같은 고등학교로 가게 되어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날 j가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로 가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아마 사라진 게 아니라 가슴속에 남아있었던 걸지도. 그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다른 반도 아니고 다른 지역이라니. b는 우습게도 속으로 ‘우리는 운명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른 지역의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j가 결국 자퇴했다고 들었을 때는 정말로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한 b였다. 자퇴라는 길은 어떤 건지,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b였기 때문에 그냥 이제는 이 동네에서도 만날 일이 없겠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j는 잊혀가고 b는 무난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난하게 대학교에도 입학했다. 주말에는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어떻게 써도 이상한 모양의 모자와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매장을 청소하고 있는 데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본 시선의 끝에는 웃으며 b를 쳐다보는 j가 있었다. ‘야! 뭐야?’ 반가움에 b가 소리치자 더욱 크게 웃어 보이는 j였다. 아마도 b의 유니폼 차림 때문이겠지. 반대로 b는 웃기기보다 신기해서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j를 훑어봤다. 그도 그럴게 j는 군화에 군복에 군모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서 뭐하는데’ j가 말했다. j는 군화를 신어서 그런지 키가 조금 큰 것 같아 보였지만 하얗게 웃는 얼굴은 b의 기억 속 중학생 j와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잠깐 동안 j와 b는 안부를 나누고 그 뒤로도 종종 서로의 안부를 묻는 문자를 하기도 했지만 아마도 중학생 b의 생각처럼 b와 j가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멀어지게 되었으니까. 

조금씩 잊혀 가는 옛 기억들의 뒤로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b에게는 j와 함께 mp3를 듣던 독서실 한 편과 언젠가 만났던 군화를 신은 j의 모습은 절대 잊히지 않을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은 기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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